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섬유

장수직물

  • 소재지:상주
  • 대표자명:남수원
  • 설립연도:1981년
  • 선정연도:2013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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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창 명주 대표주자 '장수직물'

‘장수직물’은 고 남재덕(2003년 작고) 옹이 아버지 고 남만희(1980년 작고) 옹의 대를 이어 명주공장을 시작했다. 말이야 공장이지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했다. 한때, 교직에 몸을 담았다가 퇴직하고 돌산을 사들여 돌 공장을 운영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동안 모아놓은 재산만 축냈으니 아버지에게도 아내에게도 면이 서지 않았다. 단지 그동안 아버지가 해왔던 축적된 기술로 우수한 명주를 짠다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 수원이 고사리손이라도 보태 집안일을 잘 도와주고 있어 늘 고마운 마음이었다.
 

지금의 ‘장수직물’ 남수원(57세) 대표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힘겨웠던 시절이었다. 공장이라고 해야 시멘트 벽돌로 벽을 세우고 지붕은 슬레이트로 대충 올린 정도였다. 사정이 그러하니 여름이면 벽과 지붕에서 발산되는 열기와도 싸워야 했고, 무더위에 팬티만 입고 일하기도 했다. 또한, 모기와 벼룩과도 사투를 벌여야 했다. 겨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명주에 불이 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불을 피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살을 에는 추위를 이겨내며 명주를 짜야 했다. 명주를 짜기 위해서는 장갑을 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겨울이면 꽁꽁 언 손으로 일해야 했다. 고사리손은 굳은살이 두텁게 박여 있었다. 어린 아들에게는 실로 하기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아들은 외면할 수 없었다. 천직이라 여겼으며,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장수직물’ 남수원 대표의 어머니는 직접 집에서 짠 명주는 물론 이웃집 명주를 사들여 부산과 전라도, 삼천포, 심지어 제주도까지 팔러 다녔다. 일명 ‘도보꾼’이라 불렀다. 지금 80세 나이지만 우리네 어머니가 그랬듯 집안과 아이들을 위해 참 억척같이 살아온 삶이었다. 그런 까닭에 벌이도 제법 괜찮았다. 남수원 대표는 군대를 제대하고 대를 이어 내려오던 명주공장에 곧바로 몸을 담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40년 가까이 명주와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해왔던 일이라 당연시 여겼다. 전기 모터가 나오면서 직기도 자동화 시설로 새롭게 꾸몄다.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사세를 확장하며 가내수공업에서 1981년에 정식으로 명주공장을 등록했다. 200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수직물’을 자신이 이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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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직물’은 옛날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실에 물을 먹여 명주를 짠다. 진주나 여타 다른 지방에서 마른 명주를 짜는 것과는 과정에 어려움이 있지만, 함창 명주가 여물고 견고해 품질이 더 좋은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이제는 수요가 많이 줄었다. 장묘 문화가 변하면서 수의 소비가 줄어들었고 이것과 더불어 전문 장례식장에서 싸구려 중국산을 들여오면서 한국산 명주가 외면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한복을 입는 사람들도 많이 줄었고 인조 비단 등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경영에 어려움이 더했다.
 

그러나 ‘장수직물’ 남수원 대표는 일찌감치 이러한 시장 변동을 예상했다. 한복시장으로 일찍부터 눈을 돌렸던 것이 다. 비단이라 일컫는 명주는 한복지로서 가장 선호하는 재질이다. 최고의 명품 비단을 만든다는 자존심을 끝까지 고수했으며, 대구 서문시장, 부산 진시장, 서울 동대문 광장시장 등 판로도 넓혀갔다. 22미터 한 필, 하루 50필을 생산하는 라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별도 상표를 만들어 스카프 등 직접 상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지금은 직원 5명을 포함해 부인과 아들 부부도 함께 일손을 보태고 있다. 무려 4대를 이어 가업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명주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이끌어가는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