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제재소

경일산업사

  • 소재지:안동
  • 대표자명:권영하
  • 설립연도:1973년
  • 선정연도:2013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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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조국강산을 재건해야 했기 때문에 제재소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러다가 5.16이 일어나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전국에 벌목이 금지되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미 금강송은 거의 사라진 후였다. 그렇지만 경제 개발에 힘입어 여전히 제재소가 번창했다.
 

그 후, 나라는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경제가 발전되면서 목재보다는 콘크리트, 시멘트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와 더불어 제재소도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개개인 생활이 차츰 안정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사람들은 건강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한 개발 논리에 밀려 홀대를 받았던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우리 전통 문화재와 한옥 건축의 우수성이 재평가되면서 제재소도 조금씩 살아나게 되었다.
 

호황과 불황을 거듭하면서 이곳 경상북도 안동시에 40년 넘게 제재소를 꾸려가고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경일산업사’다. 1973년 1월 1일이 등기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미 그 이전에 제재소가 있던 것을 사양길로 접어들 시점에 인수했다. 지금의 대표 권영하(76세) 옹의 새로운 복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일산업 권 대표의 생각은 남달랐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되고, 나라가 부강해져도 제재사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버팀목이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이미 제재소에서 잔뼈가 굵었던 권 대표에게는 젊음의 도전정신이 있었다. 그 복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수요는 급증했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막 시작되었고, 1973년 최초로 수출액 1억 달러를 넘기면서 ‘수출장려상’이 제정되는 등 처음에는 호황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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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호경기도 잠시였다.

잠자고 있던 중국이 개혁개방을 앞세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보다 더 저렴한 인건비와 원자재 등 인해전술로 밀고 들어왔다. 중국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지난날 제재소가 그랬듯 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했고, 전국의 나무젓가락 공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하루 인건비 100원이었을 당시 직원이 80명이었던 경일산업도 1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제재소는 포기할 수 없었다. 더 전문 분야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제재소를 꾸려가면서 기존 시설로 가능한 분야에 눈을 돌렸다. 조경자재업과 가설임대업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늘 한결같지 않았다. 계약을 했다고 해도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경기가 좋지 않았다. 자본은 늘 부족했고, 은행 문턱도 높았으며, 물건을 만들어도 판로가 없었다. 만성 재고 누적에 시달렸다. 재료의 특성상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 썩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좌절하지 않았다. 이미 여럿의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자기만 바라보며 따라와 주는 직원들의 소망을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나무는 늘 불에 취약했다. 이제는 스팀보일러를 들여오면서 화재가 나는 일은 없지만 무려 다섯 번 화재의 어려움을 겪었다. 화재보험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끝까지 이끌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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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의 말처럼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그러나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지금의 ‘경일산업’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110평에서 시작한 제재소도 현재에는 2500여 평으로 늘릴 수 있었고, 자신의 막내아들 권기호(42세) 씨를 설득해 10여 년째 함께 꾸려가고 있다.
 

권기호 씨는 처음에는 가업을 승계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으로 지금은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중이다. 1990년도까지만 해도 안동에 12개 업체가 있었지만 경일산업을 포함해 현재에는 단 2개 업체만 남아 있다.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다른 원인은 꾸준한 업종 개발에 있었다. 지지대처럼 건축보조 재료, 옛 건축물 둥근기둥, 버팀기둥 등을 다룬 것이다. 특히 문화재 보수·수리용 재료를 포함해 한옥용 자재 등 한국 전통의 정밀한 자재를 많이 취급한다.
 

권 대표 부부가 살던 안동 시내 집은 가업을 승계한 막내아들에게 물려주고, 자신들은 공장 사무실 2층에 나무보일러를 들이고, 방을 꾸며서 살고 있다. 권 대표의 좌우명은 ‘정직하고 부지런하자’이다. 살아온 인생 역경처럼 쉬운 말이면서도 가장 행하기 어려운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권 대표는 평생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덕분에 자식들 모두 출가시키고, 대학교수, 공학박사, 건축기술사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