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제재소

진흥제재소

  • 소재지:영주
  • 대표자명:남성학
  • 설립연도:1973년
  • 선정연도:2013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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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제재소 남성학 대표

남성학 대표의 고향은 봉화군 봉성면이다. 해방이 막 되고 이듬해 태어났다. 그리고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었고,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겼다. 그 후 새마을운동,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시대를 겪어왔지만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가보지 않았다. 오로지 한 길만 고집했으며, 한 우물만 팠다.
 

남성학 대표는 형제는 모두 6남매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지런히 돈을 벌어 이 제재소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한국전쟁이 끝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라 제재소는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자 부모님과 형제들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와 터전을 닦게 했다. 1991년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까지 이곳에서 모셨으며, 형제들 또한 이곳에서 모두 공부시키고 출가를 시켜 가정을 이루게 하였다. 국유림 사업을 할 당시 말 못할 애환도 많았다. 사고와 부도위기 등 필자의 질문에 말문을 닫아버리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회상에 잠기는 모습에 그만큼 속 깊은 사연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힘겨웠던 일은 본인의 가슴에만 묻어두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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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넘기는 지혜

어느 일이나 다 그렇듯 위기는 오게 마련이었다. 1980년대 국유림 사업과, 개인 산판업을 하던 중 위기가 닥쳤다. 현장 20명, 공장에 20명 등 모두 40여명의 직원이 있을 만큼 번창했던 시기였다. 시멘트와 콘크리트가 나무를 대신하고, 벌목을 할 산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무의 소비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쩔 수 없이 직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욕심 부리지 않고 작은 것에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시장을 찾았다. 그 효과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몸에 배여 있던 성실함이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전통건축 한옥재료를 생산했다. 한동안 그것으로 잘 꾸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옥재료를 제작하는 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특성상 소비가 썩 많지 않았고, 한정된 수량으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지난 날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하루의 해가 저문다고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믿음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인근 회사에서 물건을 실어 나를 때 바닥을 받치는 운반 대 빠레트 제작을 주문해 왔다. 가격도 적당했고, 경제규모가 커지고 성장할수록 운반대의 량은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인력이 모자랐다. 옛날과 달리 요즘 사람들은 힘든 일을 꺼려하기 때문에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거의 힘든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데도 인력난은 여전했다. 궁여지책으로 혈기 왕성했던 아들 남기훈(35세)의 손을 빌려 가업을 잇게 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아들도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벌써 10년 전 일이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서울에서 부동산업을 하던 동생부부를 설득해 함께 꾸려가고 있다. 제재소 옆 새롭게 건물을 지어 동생 명의로 건재 상사를 만들어 사업장을 꾸려가게 했다. 지금 이곳에는 남성학 대표이외에 부인과 동생부부, 아들과 함께 이끌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