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의 놋점거리, 즉 유기마을은 한때 호황을 이루던 곳이었다. 《신증동국여 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500년 전부터 봉화에는 유기가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니 유기의 역사는 봉화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화려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편리한 스테인리스 그릇과 도자기가 등장하자 유기는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고 이제는 옛날의 영광을 뒤로한 채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유기마을로 더 유명했던 봉화의 신흥리에도 단 두 곳만이 남아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내성유기’다.
무려 4대를 이어온 ‘내성유기’는 그야말로 유기의 산증인인 셈이다. 유기의 장인으로 인정받아 유형문화재로 등록된 김선익 옹(81세)의 할아버지인 김용범 옹(작고)•이 유기가 한창 호황이던 무렵 이곳에서 유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벌써 한 세기가 지난 일이니 그 사연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얼마되지도 않는 농사일로는 많은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웠던 까닭에 온 식구가 농사일과 유기 만드는 일을 번갈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물론 처음에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다른 사람이 운영하는 놋점에 일꾼으로 들어가 유기 만드는 일을 익혔다.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이 생기자 본인이 직접 놋점을 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집안사정은 조금씩 나아져갔다. 아들 김대경 옹(작고, 김선익 옹의 선친)이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농삿일은 물론 아버지 일까지 도운 덕분이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를 이어 유기 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물려받았고, 현재는 김선익 옹이 유기장, 즉 유기 만드는 장인이 되어 경상북도로부터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아들 김형순 씨(43세)까지 4대 째 하고 있으니 진정 유기를 만드는 일이 천직이자, 가문의 생명이며, 젓줄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익만을 추구했거나, 편한 일만을 찾았다면 결코 이어올 수 없는 가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지만, “일이 손에 익어서…” “그냥 막연하게 일 년 농사니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에…” “천직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그냥 살아온 셈입니다.” 라는 김형순 씨의 말처럼 그 속내는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바이다.
윗대 할아버지 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아온 이곳 유기마을에서 딱히 벗어나본 적이 없는 김선익 옹은 일제강점기 시절만 제외하면 평생을 유기 만드는 일로 삶 을 일구어 왔다. 마을의 이장일까지 도맡아 하면서 유기마을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제는 인생의 훈장처럼 얼굴에 골 깊은 주름만 잡혔지만, 살아온 과정만큼이나 온화한 모습이 무척 친근하다. 지난 199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인정을 받으면서 ‘내성유기’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지만 그렇다고 큰 돈을 만진다는 뜻은 아니다. 욕심도 부리지 않을 뿐더러, 재고도 쌓아두지 않는다. 대량 생산조차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왜 힘겨운 세월이 아니었을까. 담담하게 풀어놓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간혹 회상에 잠길 때면 유기장 김선익 옹의 눈에 고뇌의 흔적이 아롱거리는 것이 이방인도 알아차릴 만큼이다. 처음에는 유기 만드는 일이 놀이와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조부 대부터 봐왔던 터였으니 말이다. 솔잎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쇠를 녹였다. 고사리 손이라도 쉬지 않았다. 숯이 크면 잘게 깨주고, 나눠주고, 소소한 일을 도우며 일을 배웠다. 그렇게 조금씩 장성하는 동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쇳물에 길이 들었고 군에서 제대한 후부터는 당연히 가업을 이어받을수밖에 없었다.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것이 지금을 있게 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 마을을 떠났던 것은 군에 다녀온 시기가 전부였다. 게다가 어렵던 시절이어서 몸을 챙길 여력도 없었다. 작업환경이 열악해도 당연한 줄 알았다. 물이 흔하지 않아 애도 먹었다. 1972년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개탄을 이용해 풀무질로 쇠를 녹여야 했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고, 먼지 날리는 열악한 공간은 상 상만 해도 충분하다. 더구나 적지 않은 농사일도 병행해야했기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좁은 공간을 넓히고, 환기가 잘 되게 창을 내는 등 조금씩 작업 환경을 개선해 나갔다. 김선익 옹이야 아니라고 말씀하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형제가 7남매에 슬하의 자식들 8남매까지 대가족이었다. 그런 까닭에 남보다더욱 부지런해야 했고, 앞서야 했다. 그렇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성실과 인내 로써 이겨내야 했다. 보부상들이 워낙 많은 덕에 유기만 잘 만들어 놓으면 판로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부상들에게만 의지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앉아서 그냥 기다리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현실에 너무 안주하는 것 같아서였을까. 조랑말에 직접 유기를 가득 싣고는 하루거리에 있는 인근 장 마당에 나가 팔았다. 여인네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현찰만 고집하지 않고 물물교환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거운 유기를 다시 가지고 오는 것보다 발걸음이 훨씬 가볍기 때문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가족들 중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장마당을 돌아다니며 유기를 팔았다. 세월이 흘러 대도시 유기 도매점에 납품을 시작하면서 재고가 남지 않을 정도로 회전이 빨라지자 유기마을 어느 놋점상보다도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산림벌채금지조치가 내려지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상당히 달라졌다. 포탄의 재료로 유기가 공출을 당하면서 원료의 수급이 어렵게 된 것이다. 사실상 유기 만드는 일은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인지라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한 후 유기는 다시 새로운 호황을 맞게 되었다. 유기마을에 유기공장 20여 곳이 번창하면서 타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또한 잠시였다. 관리가 편하고 윤기가 흐르는 스테인레스 그릇과 도자기 그릇이 세상에 쏟아지면서, 유기는 그저 고물상이나 스테인레스 그릇으로 물물 교환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놋점상들이 신흥리 유기마을을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고, 신흥리는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그렇지만 김선익 옹은 다른 이들처럼 떠날 수 없었다. 윗대로부터 살아온 고향인데다 적지 않은 농사도 지어야 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유기와 함께 살아온 평생의 시간을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또한 당시에는 기술만 있으면 일일이 몸으로 하는 농사일보다 유기 만드는 일이 훨씬 수월한 편이었기에 자식에게도 농사보다는 놋점을 물려주고 싶었던 마음이 한몫을 거들었다. 결국 아들 김형순 씨에게 물려주었고 이제는 일손을 놓은 지 10년 가까이 된다.
잎이 엉성한 감나무에 주렁주렁 붉게 익어가는 감이 가을의 풍요를 알리고, 뒷산에는 형형색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단풍이 물들어갈 즈음에 '내성유기‘를 찾았다. 평일이라서 멀리 개짓는 소리만 들려올 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넓은 매장에는 ‘내성유기’의 내력을 말해주듯 다양한 종류의 유기가 비닐에 쌓여 단정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벽에는 경상북도에서 발행한 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증서와 경상북도 뿌리기업이라는 인증서가 더불어 자랑스럽게 걸려있었다. 무려 백여 년 전에 경주부윤이 발급해 준 서류까지, 집안에 역사와 전통이 가득했다. 인기척에 밖으로 나온 이는 김선익 옹의 아들 김형순 씨였다. 평범해 보이지만, 훌쩍 큰 키에 깊은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잘 먹고잘 자란 덕에 딱히 할 말이 없다고는 했지만, 유기 만드는 일에 대한 자부심만큼 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인사와 함께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 카메라에 유기를 담던 중, 김선익 옹이 들어왔다. 주름이 골 깊게 패인 얼굴에 다정다감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거칠고 어려운 세월 속에서도 순한 마음과 정갈한 성정으로 유기 만드는 일에 전력을 다했기에 얻어진 고운 모습일 것이었다. 이것저것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을 뿐더러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말투에서는 단단한 의지가 엿보였다. 아들이 잘하고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는 김선익 옹이다.
옛날 할아버지와 선친이 깨알처럼 썼던 장부를 가져와 지난날을 추억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거슬러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보인 양 세월의 때가 묻어 누렇게 빛바랜 장부에서 유기와 가업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1946년 광복 후부터 기록 했다는데, 현금은 물론 쌀, 조, 보리쌀 등등 물물교환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의 유통구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칠첩반상 기 1조, 변병 4조, 대접 2조, 식기 10조, 괘반병 10조, 최근에는 사라진 요강까지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하다. 그밖에 술잔, 양푼이, 옥식기, 쟁반 등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작업일지 역시 누가 무얼 얼마나 만들었는지, 만든 사람은 누구였는지, 깎은 사람은 또 누구였는지, 원태복이며 박명수며 이름까지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어 당시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아들 김형순 씨의 안내로 공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거푸집에서 온 몸으로 불을 받아들이며 녹아가는 쇳물이 어두운 공간을 밝히고 있었고, 한 쪽에서는 각각의 분업에 맞게 식기와 수저를 만들고 있었다. 유기의 본틀에 끼워진 채 쉼 없이 돌아가며 몸을 깎는 식기나 본기에 주석과 구리를 정확한 비율대로 섞은 쇳물을 부어 찍어내는 과정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섬세한 손길로 수저를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광내기에서는 장인의 정성이 돋보였다. 다른 방으로 들어가자 그동안 ‘내성유기’를 있게 한 형틀(본기)이 온 방에 가득했다. 종류와 크기에 따라 다양한 형틀이 무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있었기에 유기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김형순 씨가 유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1차는 불질(부질간)이다. 즉 쇳물을 녹이는 작업인데, 미리 정해진 형태의 암틀과 숫틀에 부어 모양을 만든다. 그러고 나면 반짝반짝 윤이 나게 표면을 깎는 작업이다. 이것은 가질(가질간) 작업이라고 하는데, 칼질을 이렇게 부르는 듯하다. 목욕재개를하는 과정인 셈이다. 가질 작업이 끝나면 광내기 작업인 연마(광간공정)의 공정을 거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유기가 탄생된다. 그러나 중간에 가질 작업 전 불에 몸을 맡기고, 다시 냉수마찰로 열을 식히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해야 한다. 이는 유기의 성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단순하게 단단한 쇠에서 탄력성이 높아지는 상품으로 거듭나는 순간인 것이다. 그래서 이 과정을 거쳐야만 부러지거나 갈라지는 현상을 막을 수 있으며, 물건 자체도 탄력이 생기면서 차지고 부드럽게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