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유기

봉화유기

  • 소재지:봉화
  • 대표자명:고태주
  • 설립연도:1946년
  • 선정연도:2015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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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장의 맥을 이어온 봉화유기

그렇게 번성했던 유기마을이지만 이제는 단 두 집만 유기를 만들고 있다. 역사와 문화가 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사양길로 접어들고 유기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달라진 세상이 야속할 뿐이다. 그렇다고 앞날의 희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 모두 이들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기때문이다. 지나온 시간과 추억이 깃든 마을, 그 속에는 소박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그 까닭은 고집으로 똘똘 뭉쳐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 ‘봉화유기’가 있기 때문이다.

‘봉화유기’는 지금의 대표 고태주 씨(62세)의 할아버지, 유기장 고해룡 옹 (2004년 작고)의 선친 고부리 옹(집에서는 창업이라고 불렀다)대에서 시작되었다. 놋점거리가 유기제작으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시절, 살던 초가집 창고와 화장실, 마구간을 개조해 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굳이 왜 유기 만드는 일을 시작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삶에 있어 절박한 그 무엇이 그로 하여금 거친 흙과 쇳물을 만지게 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봉화유기’가 3대에 걸쳐 지금까지 전통적인 가업으로 이어온 데에는 별다른 사연이 있다. 고태주 대표의 아버지 고해룡 옹이 열 살 남짓 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가 일하는 놋점에 들어갔다가 유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보며 무엇엔가 빨려 드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불빛인 듯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더구나 놋점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달궈진 화덕을 통해 녹아나온 쇳물이 어느새 그릇으로 탈바꿈 하는 신기한 장면을 보자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면서 달아올랐다. 자신이 평생 걸어야 할 업業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생전의 목소리를 들어 보자.

“암만 해도 그거는 시뻘겋게 속을 내비치는 불덩이였더니, 고마 해를 녹여내는 줄 알았잖니껴. 참말로 새벽녘에 하늘로 치솟는 해가 녹아 내리만 그리 붉을 란지……”(신문기사 中) 붉은 불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순간부터 놋점은 그에게 최고의 놀이가 되었다. 아버지 몰래 놋점에 들어가 쇠를 녹이는 것이 가장 신나는 놀이로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달랐다. 당신께서는 비록 업으로 받아들인 일이었지만 쇳가루를 뒤집어쓰는 험한 일을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들키고 숱하게 맞았니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맨날 각서도 썼지만, 그런데 그란다고 이미 내 마음이 맘대로 되니껴? 나는 학교도 가기 싫고 날만 새만 그기 하고 싶은걸.”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처럼 결국 14세가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놋점에 드나드는 자유를 얻어냈다. 기어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놋갓장이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정식으로 전수받고 밤새 쇳물을 녹여 반짝이는 유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주문도 밀려들어서 놋점을 마음껏 드나들며 신명나게 유기를 만들었다. 그때가 그에게는 가장 신나고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실 유기는 일제에 의해 제대로 그맥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에 산림벌채금지조치가 내려졌고, 뒤이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전쟁 물자 생산을 위해 전국의 놋그릇이 징발됨에 따라 사실상 유기 만드는 일이 금지되고 만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일본 순사들 눈을 피해 해가 지고 어둠이 세상에 내리고 나서야 불빛을 빌어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감시의 눈초리가 점점 심해지면서 유기의 원료인 주석과 구리를 장만하는 데 어려움이 심해졌다. 고물상을 통해 원료가 될 만한 물건이면 무조건 사들이는 것으로 근근이 지탱해 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힘겨움은 더 해갔으며, 일제가 벌이는 전쟁 통에 구리와 주석의 가치는 점점 높아갔다. 뒤이어 광복을 맞아 잠시 호황을 이루는가 싶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전쟁 이후 일반가정에 연탄이 보급되면서 식기로서의 기능을 상실케한 치명적인 흠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유기가 연탄가스에 녹이 슨다는 사실이었다. 설상가상 군대에 입대한 후 아버지의 부고까지 들어야 했다. 제대 후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내리라 다짐했지만, 그것 역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편리한 스테인레스와 알루미늄그릇이 세상에 쏟아지자 놋그릇은 고물상에 처박히는 처지로 팔자가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시간도 없이 집안의 운명은 유기의 퇴락과 함께 기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유기 만드는 일이 의미가 없어졌다. 화려한 과거는 단지 과거일뿐이었고, 현실의 여파는 모질게 밀려왔다. 성황을 이루던 놋점거리의 놋갓장이들도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풀무질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고, 늘 사람들의 발길로 분주하던 마을도 한적하기 짝이 없게 변해버렸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놋점에 빗장을 채우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도 10남매의 맏이인 자신이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전히 밥은 먹어야 했고, 일도 해야 했다. 결국 과거와 현실과의 기로에서 홀로 되신 어머니를 남겨둔 채 동생들만 데리고 서울로 상경하는 결단을 내렸다. 정든 고향을떠나기가 쉽지 않았지만, 10남매의 맏이라는 힘겨운 위치가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했는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하늘은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 유기를 생산해 수출하던 ‘동아공예’에 취직하는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어쩌면 평생 유기와 함께 살라는 하늘의 메시지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유기를 만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놋그릇만 보면 그때마다 자물통이 굳게 채워진 놋점을 혼자 지키고 계실 고향의 어머니 생각에 가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지만 차일피일 견디는 동안 그렇게 12년이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가 외롭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에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는 고향의 텅 빈 집으로 내려와 굳게 잠긴 놋점의 빗장을 눈물로 열었다. 게다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터라 가장이라는 책임 역시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다. 편리하고 빛깔 좋은 서양 식기는 물론이거니와 도자기도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유기는 여전히 뒷전이었다. 이에 유기의 숨결을 새롭게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고 그 동안 끊어 졌던 봉화유기의 맥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참으로 외로운 싸움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돈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묵묵히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렇게 아들들을 다독이면서 버티기를 몇 십 년이 지났갔다. 큰아들과 며느리 작은아들까지 가업에 힘을 보태오자 고해룡 옹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가끔 놋점에 들러 이것저것 챙기면서 지난 시절을 추억하거나 마지막 하나까지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결국 당뇨라는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200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야 말았다. 14세에 정식으로 아버지 그늘에서 시작해 평생을 유기만을 붙들고 살아온 삶이었다. 잠시 동안의 서울 생활을 빼고 나면 반백년이라는 세월을 오롯이 유기장으로 지나온 인생이었다. 지난날의 힘든 여정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모두 미뤄두고 앞만 보며 달려왔던 삶은 이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온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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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가업을 이어받다

이제는 고해룡 옹의 장남 고태주 씨와 동생 고호규 씨(51세)가 가업을 이어받아 ‘봉화유기’를 꾸려가고 있다. 고태주 대표는 옛날을 기억해 달라는 필자의 물음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조곤조곤 말을 풀어냈다. 할머니는 보부상을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유기를 머리에 이고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면서 인근 장시를 찾아 장사를 다녔다. 봉화, 안동, 옹천 등지를 다니며, 설령 그곳에서 자야 할지라도 다 팔고나서야 돌아오곤 했다. 물론 현금으로 받기도 했지만, 쌀과 부식으로 교환해 돌아오기도 했다. 유기가 워낙 무거워 들고 간 것을 다시 되가져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외상 거래도 마다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할머니에 이어 어머니 역시 똑같은 일을 이어갔다. 유기를 안겨주다시피 하고서 돌아섰을 허전한 발걸음을 감히 상상이라도 알 수 있을까?

고태주 대표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외지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유기 일은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어느 날 우연을 가장해 필연처럼 찾아왔다. 어머니는 물론, 중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 함께 유기 만드는 일을 해 오던 동생까지 함께 하자고 부탁하자 물리치기가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대표는 후계자 자리는 어린 시절부터 유기에 잔뼈가 굵은 동생의 몫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쨌던 28세가 되면서 결국 이곳으로 돌아와 아버지 그늘에서 동생과 함께 유기 만드는 일을 시작한 고대표는 처음에는 참으로 막막했다고 당시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한 가업을 쉬이버린다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로 현대식 그릇에 밀려 어렵게 버텨왔던 것이 3·40년 전부터는 더욱사양길로 접어들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않았다.

자동차도 1987년에서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다. 새벽밥 먹고 인근의 풍기까지 달려가 운전을 배워 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15톤 트럭과 충돌하는 끔찍한 교통사고가 나면서 트럭은 폐차하는 지경에 이른데다, 몸 역시도 이루 말할 수 없을정도로 망가졌다. 설상가상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집에 불까지 나고 말았다. 누군가가 실수로 광택제를 연탄 위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마치 하늘이 모든 것을 거둬가려고 작정한 듯 보였다. 다행히 사고 후유증이 깊지 않아 퇴원은 할 수 있었지만,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유기 만드는 일을 포기하고 문경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아서 결국에는 잠시 한눈 판 것을 반성하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 만드는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그럴수록 어려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유기 제작에 정성을 다했다. 그러면서도 어려움을 극복할 돌파구와 변화를 모색했다. 고 대표는 시장을 넓게 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릇 하나만 고집하지 않았다. 생활용품은 소비자가 외면하는 실정이니만큼 사찰에서 쓰는 불구佛具와 다기, 요령 등 다양한 물건을 생산해 대구, 김천, 상주, 구미 등지의 불교상과 직거래를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씩 희망이 움을 틔웠다. 그리고 이제는 70여 곳이나 되는 단골이 생겼다. 또한 15여 년 전부터는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생활유기의 소비가 조금씩 늘어났다.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었다. 지자체가 막 시작되기 전 임명직이었던 마지막 봉화군수가 도움을 많이 주었다. 유기제품을 단체로 구입하는가하면 선물용, 상품용, 증정용 등의 주문생산으로 지금의 ‘봉화유기’가 있을 수 있었다.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공장을 현대식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유기는 만드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구리 78%, 주석 22% 비율이 정확해야만질 좋은 제품이 생산된다. 이 비율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제작방식도 옛날 아버지가 하던 그 방식을 고집하면서 그것에다 정성을 덧댈 뿐이다. 다만 옛날과 달리 유기의 원료가 되는 주석과 구리의 값이 몇 곱절이나 올라 어려움이 있지만, 이 또한 이겨 가리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다만 원자재 값이 올라도 너무 올라 어쩔 수 없이 상품가격을 인상했다. 그러자 이제는 소비가 뜸해졌다. 유기가 고가 상품으로 취급되면서 제기祭器 역시 전 같으면 일 년에 5세트 이상 팔리던 것이 한두 세트 나가는 까닭에 무리한 대량생산은 하지 않았다. 조금씩 소량으로 생산해 판로를 개척하다 보니 일 년에 새로운 상품을 만들기 위한 샘플이 다섯종이나 늘어나게 되었다. 옛날 사용하던 것과 합치면 종류가 무려 일천 여점에 이를 정도로 다양해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종류는 줄이되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에 주력 중이다. 특히 여성들이 좋아하는 디자인을 개발하는데 공력을 아끼지 않아서 화로, 향로, 촛대, 컵, 찻잔, 꽃과 동물 형상의 장식품 등이 탄생했다. 욕심이라고 해봐야 그저 지금처럼만 되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는 고 대표다. 하지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기를 3D업종이라 여기고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처럼 찾아와 배우길 청했던 사람도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힘에 겨운 나머지 스스로 떠나버릴 만큼 일이 고되고 열악하다.

그럼에도 유기와 함께한 지 벌써 30년이 훌쩍 넘었다. 돈을 생각했다면 쉬이 달려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군만마와 같은 응원군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성실함으로 함께해 온 동생은 물론이거니와 평생의 동반자 아내 이차영 씨(58세), 그리고 봉화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두 딸을 포함한 사 남매가 그들이다. 특히 자녀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늘이 있어서 반듯하게 자랄 수 있었다. 예의를 지킬 줄 알고, 어른을 공경하면서 세상의 질서를 알아가는 모든 결실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과 정서 덕인 것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아내와는 맞선을 본 지 일주일 만에 결혼했다. 비록 여동생이 혼인날을 잡자 동생이 오빠보다 더 일찍 결혼할 수 없다는 어른들의 완고한 고집으로 이어진 인연이지만, 이 역시 하늘이 맺어준 배필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후덕한 인상의 고 대표와 달리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아내 이차영 씨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워준다. 그래서 인지 봉화유기는 이곳 놋점거리 말고도 가까운 영주시 터미널 인근에도 판매전시장을 열어 유기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또한 아버지에 이어고 대표 역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 봉화유기장으로 지정(1994년 9월 29일)되어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봉화유기’ 고태주 대표는 사람들이 건강에 좋은 유기를 더욱 사랑해 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조상께 지내는 차례를 반짝이는 유기로 지낸다면 더욱 품위가 있을것이고, 거실 진열장에 악세서리처럼 놓아두어도 멋스럽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봉화유기’는 이 순간에도 더 아름답고 질 좋은 유기를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