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기계

삼양연마공업(주)

  • 소재지:영천
  • 대표자명:손기락 외1
  • 설립연도:1977년
  • 선정연도:2015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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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연마공업

‘연삭숫돌’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단어일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연삭기에 장치하여 연마 작업을 하는, 둥근 바퀴 모양의 숫돌’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서 연삭기란 ‘숫돌바퀴를 빠르게 회전시켜 공작물의 면을 갈고 다듬는 기계’를 이른다. 이쯤되면 무엇을 하는 공구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마기기 하나로 시대를 앞서가는 기업이 바로 경상북도에 있다. 6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차별화된 시스템과 앞선 경영, 근로자와의 화합이라는 아름다운 연결고리를 만들면서 오로지 한길을 걸어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다. 바로 영천시에 자리하고 있는 ‘삼양연마공업㈜’다. 1997년 대통령표창을 기점으로 1999년에는 기술신용정보기금으로부터 우량기술기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0년 11월에는 중소기업청으로부터 기술혁신형 중소기업(INNO-BIZ)•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수많은 특허와 수상 실적을 쌓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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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영천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다

1960년대 초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잘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불길처럼 번지면서 나라 전체에도 조금씩 활기가 돋아났다. 그 기운에 힘입어 회사가 들어서 있던 원대동에도 주택들이 오밀조밀 들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회사 운영에 걸림돌이 되었다. 주택가에서 회사를 꾸려가기에는 협소한 터 문제 등 주위 여건이 원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 심사숙고 끝에 대구와 인접한 영천시에 새로이 자리를 만들어 둥지를 틀게 되었다.

바야흐로 1978년, 제2의 ‘삼양연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와 함께 회사는 대한민국 공식 새마을 회사로 지정되었고, 미래를 위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이제는 성형, 소성, 세공, 검사, 포장 등 모든 분야에 자동화를 도입하는가 하면, 임직원 모두가 일치단결해 생산성 향상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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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가업을 이어받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자신이 가업을 이어받을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버지 손기락회장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회사가 더욱 발전을 거듭했을 때도, 손기락 회장은 회사에 대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아들 손동기 사장(53세)은 아버지가 세계 연마업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 노턴사에서 연구원으로 생활하던 시절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은퇴 후 어머니 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하고 있던 손 대표는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제너럴 다이내믹스 부사장으로 3년째 근무하면서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손기락 회장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리했듯이, 아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가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다.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에 손동기 대표는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결코 쉬운 과정을 지나지 않은 때문이었다.

게다가 손 대표는 이미 그곳 대학교에서 만난 인연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래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인들 아들의 꿈을 어찌 몰랐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나 당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단언컨대 미래에 대한 남다른 비전도 가지고 있었다. 오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아들 손 대표는 결국 용단을 내렸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가 꾸려온 가업을 자신의 손으로 꾸려가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2012년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손동기 대표는 아버지로부터 ‘삼양연마공업㈜’ 경영 전반에 걸쳐 후계자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연마기기에 대해 별반 아는 것이 없었던지라 모든 것이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성실한 경영철학과 정확한 시장조사, 그리고 구체화되고 완벽한 데이터베이스만 제대로 구축되어 있다면 정확한 분석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하면 된다는 긍정의 마인드가 가슴에 살아있었던 데다, 미국 굴지의 기업에서 경영에 참여했던 경험이 용기와 긍지로 작용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경영수업을 마친 손동기 대표는 2013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대표이 사(사장)로 정식 등록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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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의 잠재력

모두가 힘들어하던 외환위기도 전 임직원이 똘똘 뭉쳐 지혜롭게 넘겼다. 단 한번도 급여가 밀린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상여금만큼은 반드시 지급했다. 이는 직원들과의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손기락 회장의 철칙 덕분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직원이 내 집처럼 즐기면서 일하고, 당연히 이 모든 것들이 호재로 작용한다. 또한 57세 정년이 되더라도 본인이 더 근무하기를 원하면 연장이 가능하다.

손동기 사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와 경영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프레임을 짜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표현대로 비행 중에는 비행기 엔진과 부속품을 교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의 경영철학대로 변화시켜가는 중이다. 마침 아버지와 초기부터 함께 일해 온 직원들이 정년퇴직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한때는 전 생산설비를 자동화한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매출은 높이되 인력감축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경영철학을 이해하고 마음을 접었다. 이제 2016년이면 완벽하고도 체계적인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됨에 따라 전문기업의 모습을 갖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또한 옛날과 달리 찾아가는 서비스, 즉 더 넓은 판로를 구축함과 동시에 시야를 다각도로 넓혀 종합적인 경영과 영업을 진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물론 아버지와 비교해보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연구개발에 승부를 건다는 생각은 아버지와 뜻을 함께한다. 아버지가 R&D, 즉 연구개발 전문가라면,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부사장의 경험을 가진 그는 전문경영인이라 할 수 있으나, 돌다리도 두드려보면서 걷는다는 아버지의 경영방식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직원복지와 더불어 제품개발에 재투자하니 제품의 질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65년의 잠재력이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발휘되었다. 우리나라 연마업계 중 규모 면에서는 비록 일등이라 자부할 수 없지만, 품질 면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지금도 외국의 바이어들이 찾아와 연마기기에 대한 자문을 구할 정도이다. 엔저의 일본과 중국의 물량공세 중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희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은 품질의 승부다. 그에 대한 효과 도 현재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별다른 영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중국 포스코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미국과 캐나다, 인도네시아에 이어 중국과 베트남에도 수출길이 열린 것이다. 바로 품질만이 무한경쟁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초심을 잃지 않았던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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