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식품

천일제면

  • 소재지:경북 안동시 풍산읍 풍산공단길 26
  • 대표자명:임상오
  • 설립연도:1968년
  • 선정연도:2016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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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찜닭, 안동식혜, 안동간고등어 그리고 - 안동국

음식은 그 지방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고 이어진다. 안동사람들은 사투리로 국수를 국시라고 부른다. 안동사람들이 국시라 부르는 국수에 대한 남다른 이야기가 있다. 고등어와 문어의 판매가격이 안동에서 결정된다고 할 만큼 양반가가 즐비한 안동이다. 종가에서 불천위不遷位•를 비롯해 반가班家에서 모시는 제사가 흔해 소비가 많다는 뜻이다. 격식도 무척 까다롭다. 예의범절은 물론, 손님에 대한 예도 격을 다했다. 어떤 음식을 내느냐에 따라 손님에 대한 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안동은 물론 예천, 영주 등 경상도 북부지방에서 국수는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술상 뒤에 따라나오는 음식이었다. 안동찜닭, 안동식혜와 더불어 안동국수의 역사도 매우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안동국수는 손이 많이 가고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안동국수의 별난 맛은 재료와 정성에 있었다. 경상도 북부지방 사람들은 음식에 콩가루를 많이 넣어 먹는다. 땅에서 나는 고기, 콩이 몸에 좋은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쉬이 넘기지 않았다. 나물을 데쳐 무쳐도 밀가루 대신 콩가루를 넣는다. 부추를 쪄도 콩가루에 버무려 무친다. 그러니 칼국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칼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3:1 비율로 섞어 반죽한다. 그런 후 안반에 홍두깨로 밀어 창호지처럼 얇게 편 다음 가늘게 썰어서 다시육수에 푸성귀와 함께 넣고 삶아낸다. 웃기(고명)로 호박을 채 썰어 볶고, 잘게 다진 소고 기, 계란지단과 김가루를 올리고, 양념간장으로 간을 맞춰 먹는다. 웃기 종류가 많을수록 권위나 부를 상징하기도 하며, 손님에 대한 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웃기의 종류는 건진국수(잔치국수)도 칼국수와 같다. 물론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푸성귀만 넣고 끓여서 양념장을 뿌려 먹는 것도 별미다. 이때 조밥이나, 보리밥, 제철 채소가 곁들여지면 금상첨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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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로 반세기를 이어온 - “천일제면”

경상북도 북부지방 작은 고을 예천은 이미 신라시대 757년(경덕왕16) 수주군에서 예천군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과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예안·안동·순흥·예천醴泉 등의 고을은 태백산과 소백산 남쪽에 위치하였는 데 여기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이 쓴 《택리지》에 나오는 글이다. 첫 글은 좋은 터를 이야기 하고, 두 번째 글은 예천이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라는 뜻으로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라 할 만큼 이름난 곳이었다. 즉 예천은 소백준령小白峻嶺 정기를 이어받아 맥이 짚이는 곳에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천에서 제법 잘 나가는 제면소로 이름이 났다. 얼마간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관념이란 애초에 없었다. 현재 임상오(60세) 대표의 아 버지 임인수(1968년 작고) 옹은 참 부지런히 일했다. 어머니 역시 그랬다. 방앗간 에서 가래떡을 만들어와 국수공장에서 밤을 지새워 썰어 팔기도 했다. 임상오 대표 역시 어린 시절부터 국수와 함께해온 시간이었다. 학교에서 마치고 돌아오면 고사리손으로 누나와 함께 국수 포장작업을 했다. 또한 자전거로 인근 식당으로 배달하러 다녔고, 간혹 수금을 다니기도 했다.
당시에 모두 현금거래가 이루어졌던 까닭에 큰방 이불 아래 손을 집어넣으면 지폐뭉치가 수북했다고 회상한다. 한두 장 슬쩍해 주전부리를 사 먹었던 기억은 추억이라기보다 아픔이었다. 한창 일하실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하늘이 시샘했다. 하늘은 간혹 행복한 사람들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가 보다. 1968년 12 월 그해 마지막 날, 식당에 납품한 국수 대금을 받으러 다니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임상오 대표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서울에 유학하던 임 대표는 곧바로 고향 예천으로 내려와야 했다. 학구열에 불 타던 그였지만,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곧바로 어머니를 도와 국수 만드는 일에 달려들었다. 친척에게 돈을 세는 것을 맡길 만큼 숫자에 어두운 어머니였지만, 통 큰마음은 남달랐다. 국수 만드는 일은 물론 시장도 넓혀가기 시작했다. 경상북도는 물론, 강원도와 충청도까지 국수가 팔려나갔다. 임상오 대표는 동생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군대에 입대했다. 삼 년을 마친 임 대표는 제대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머니 를 도와 국수공장을 꾸려갔다. 상설시장에 있던 “천일제면소”는 1979년에 예천읍 노하동으로 자리를 옮겨 새롭게 확장해 둥지를 틀었다. 어머니, 남동생, 그리고 직 원도 10여 명이 있었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