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식품

양남국수

  • 소재지:경주
  • 대표자명:이용희
  • 설립연도:1955년
  • 선정연도:2015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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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운명을 성실로…

‘양남국수’는 현 이용희 대표(58세)의 부친인 이상열(2011년 작고) 옹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상열 옹은 열두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하늘을 원망할 줄조차 몰랐던 그는 그저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힘들었고, 다시는 볼 수 없다는 현실이 먹먹했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사연은 증조대로 올라간다. 무척 부유하고 유복한 살림을 살았던 증조할아버지는 맏이인 할아버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그 재산을 다시 큰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막내였던 아버지는 큰형과는 스무 살이나 나이차가 났다. 그런데 그 큰형 이 재산을 모조리 팔아 중국 만주로 떠나버리고야 말았다. 독립운동을 위해서였는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였지 알 길은 없지만, 그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자식들을 남겨두고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나자 홀로된 아이는 할아버지와 작별을 고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떻게 누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갈 수 있었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아이가 낯선 타국에서 모진삶을 살아야 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낮에는 철공소를 다니며 돈을 벌었고, 밤에는 야학에 다니며 공부에 몰두했다. 워낙에 천성이 착하고 성실했던 터라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에서 글을 깨우치면서, 생활 습성까지 일본인을 닮아갔다. 어쩌면 정직한 삶을 살아온 것도 혼자 겪은 타국에서의 설움이 준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을 따라 아이는 청년이 되어갔고, 그간 일본에서 모진 고생을 하며 번 돈을 고향에서 쓸쓸하게 계시던 할아버지에게 보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형제들이 여전히 살아있다 보니 입이 많은 살림살이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드디어 광복을 맞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고, 장성한 아이는 이를 기회로 고국으로 돌아왔다. 열두 살의 어린아이가 어엿한 스무 살 청 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구멍 뚫린 생활고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간 할아버지에게 보냈던 돈은 흔적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욱이 병석에 계셨던 할아버지는 손자가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지금껏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손을 잡은 채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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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서의 새로운 삶

일본에서 글을 깨우친 그는 고향인 경주 양남면사무소에서 서기로 근무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입에 풀칠이야 했지만 여전히 궁핍한 삶이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면서 한 여인을 만나 결혼해 가정도 이루었다. 당시 아내의 나이 15살, 딱 10살의 차이가 있었다. 슬하에 씩씩하고 예쁜 아이들도 태어나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지만 말단 공무원의 급여에 의지하는 어려운 살림살이다 보니 내 집 마련은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때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매형이 처남인 자신에게 국수공장을 권했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원조된 밀가루 공급이 많기도 했거니와, 밀농사 역시도 제법 되던 시대상을 정확하게 읽은 덕분이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이었던 점은 최소한 아이들 끼니만큼은 해결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하여 고민 끝에 공무원을 그만 두고 매형이 사준 수동기계로 국수공장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국수를 만들어 소비자에게 파는 형태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직접 농사지은 밀가루를 가져오면 국수를 만들어 주면서 일정부분을 품삯 대신 국수로 받는 식이었다. 물론 현금도 오가긴 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고, 거의가 삯국수로 대신했다. 그렇게 받은 국수를 전부 아이들에게 먹인 것은 아니었다. 국수는 따로 모아서 팔았고, 다만 반죽할 때 그릇에 눌어붙은 밀가루를 칼로 긁어내 새로 국수를 만들어 아이들을 먹였다. 그러다 보니 양이 충분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동네 아이들이 부러워했다니 그 시절의 궁핍함이 어떠했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음이다. 그러니 국수공장이 점점 늘어나는 현상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양남국수’ 이용희 대표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는 같은 면단위에 국수공장이 네 곳이나 성업을 이루었을 정도였다. 당연히 과열경쟁이 벌어지면서 국수가격이 낮아지는 등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격을 낮추지 않았다. 품질이 생명이란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아니면 모두가 굶어야 한다는 사실, 2남4녀의 자식들 모두가 자신의 몫이라는 책임감이 그를 닦아세웠다. 절대로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겠다고,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게 키우겠다고 의지를 세웠다. 그렇게 국수를 만들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성실과 친절, 신용과 정직으로 대했던 그의 삶은 결국 국수로도 연결되었다. 어찌나 섬세하고 완벽했던지 사람들은 아버지에대해 “먼지도 까서 먹겠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결국 사람들은 다른 곳보다 비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만든 국수를 찾았다. 그렇게 10년을 손으로 돌려가며 국수면발을 뽑았다. 점점 입소문이 나면서 조금씩 상황이 좋아졌고, 덕분에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원동기가 들어와 국수 만드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물론 한눈을 팔다가 원동기 팬벨트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반죽 롤러에 손을 여러 번 다치기도 했지만, 국수 만드는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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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받다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고분고분하고 여리기만 했던 천생 여자인 어머니와 달리 새어머니는 무척 밝고 장사수완도 좋았을 뿐 아니라 매사가 똑 부러졌다. 어두운 상처를 잊기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히 흘러갔다.
 

그리고 원동기가 들어온 지 10년 만인 1975년,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는 새 기계를 들여와 전기로 가동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손으로 돌리던 것을 원동기를 이용해 돌렸고, 이제는 전기를 이용해 국수를 뽑고 있지만, 그렇다고 맛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신통한 새 기계처럼 새어머니 역시 국수공장 인근에 점포를 열어 다시마, 멸치, 달걀, 국수를 파는 등 억척같은 삶을 이어갔다.
 

이때 아들 이용희 대표는 학업을 마치고 성인이 되어 기업체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잔병치레가 잦았던 아버지가 몸도 마음도 조금씩 약해져서 국수공장 꾸려가기를 힘겨워했다. 게다가 외환위기가 찾아와 국 민을 가난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절약과 절제의 생활을 강요받기 시작한 터였다. 이를 기회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국수공장을 물려받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아들은 1985년에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었기에 선뜻 내켜하지 않았다.

아내 김명희씨(54세)도 역시 반대했다. 40대 불혹의 나이에 업을 바꾼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었는지, 하늘에 계시는 어머니의 바람이었는지, 결국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였다. 1998년 6월, 이용희 대표는 도심의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본격적으로 국수 만드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용희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국수와 더불어 살아온 터였다. 국수 하나로 학교를 마칠 수 있었고,이렇게나마 가정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마침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집이 울산에 있었던 터라 왕복 두 시간 거리를 아내와 함께 오가며, 아버지로 부터 국수 만드는 일에 대한 전부를 전수받았다. 그러면서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국수 맛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늘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10월 2일, 잠시 피곤에 젖어 졸다가 검지가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해 결국 손가락 한 마디가 절단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이미 어린 시절 국수공장에서 놀다가 오른쪽 중지가 국수 기계에 끼어들어가는 바람에 지금도 손가락 끝에는 톱니바퀴처럼 흉터가 나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기계에 신경을 쓴다. 잘려나간 손가락을 볼 적마다 늘 새롭게 다짐하는 것도 잊지않고 있다.

그러나 갈등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새어머니와의 갈등이었다. 아버지의 국수공장을 꾸려가는 대신 매달 100만원을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아들은 당연하 게 새어머니 부탁대로 했었다. 그러나 성수기인 봄·여름철에는 가능했지만, 비수기 때는 불가능했다. 비수기에는 만들어 팔고 나면 빚만 안게 되기 때문이었다. 사정하며 50만원만을 드리겠다고 하니 공장을 비우고 나가란 말씀이 돌아왔다. 그렇게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어야 했다. 그렇다고 아내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용희 대표는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바로 독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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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시작한 ‘양남국수’

아버지와 새어머니 몰래 땅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타고난 사람을 앞서가듯,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긴 사람이 나타나 땅을 빌려주었다. 비록 월세이기는 했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이었다.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도로가의 넓은 터였다. 바로 그곳에서 그는 국수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성과 맛은 변함이 없는 법. 그는 이곳에서 제2의 ‘양남국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전의 국수공장에서 점포를 열고 장사를 하던 새어머니께는 국수기계를 가져오는 대신 칼국수를 뽑아서 장날마다 팔아서 용돈 쓰시라고 보내주곤 했다.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반성함으로써 배운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품질로 승부를 건다. 맛은 결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인근 국수공장 중에서 혼자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정직함과 성실함을 오롯이 물려받은 덕분이었다.

낮에 주문을 받아 밤에 배달을 하는 고단한 세월이 흐르면서 옛날 어머니께서 해주시던 바로 그 국수 맛을 기억한 사람들에 의해 공장은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었다. 단 한 번이라도 맛을 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고정단골이 되었다. 맛의 비결은 모든 과정에 있지만, 무엇보다도 만들어 놓은 면발의 건조과정이 중요하며 그 다음은 숙성이다. 건조장 바닥에 청결과 품질관리를 위해 에폭시를 깔아 습도를 한결같게 한다. 물론 날씨에 따라 반죽이 달라진다. 질고 되고, 그간 경험에서 우러나온 감각으로 조절한다. 이제는 소금물의 색상과 질감만 보아도 상태를 알아낼 정도가 되었다.

또한 건조과정에서는 바람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동풍의 들바람, 남동풍의 마파람, 그리고 갈바람, 샛바람, 하늬바람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빠른 시간에 건조가 이루어지는 건조한 남서풍의 청갈바람은 국수 건조에 최악의 조건이다. 따라서 하늘이 이상타 싶으면 곧바로 건조실 문을 꼭꼭 닫아야 한다. 일을 하다가도 하늘을 쳐다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세를 얻어 시작한 지 3년 만에 공장 터를 인수해 본인의 것으로 만들었다. “아 무리 봐도 이 땅은 이사장 거 같아!”하며 기분 좋게 넘기던 땅주인의 고운 심성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천객만래千客萬來라고, 많은 손님들이 번갈아 가면서 찾아주었다. 그렇게 잊지 않고 찾아주는 고객들을 위해 우리 자식들을 먹인다는 초심으로 더 좋은 품질을 위해 정성을 다할 것을 늘 다짐하고 있다. 그러한 정성 덕분인지 사람들은 이 집에서 뽑아낸 국수에 환호한다. 판로 자 체가 거의 택배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근 경주와 울산뿐 아니라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강릉, 제주도까지도 나간다. 인근 식당에는 아주 일부만 공급할뿐이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