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식품

(주)미정

  • 소재지:경주
  • 대표자명:정재현
  • 설립연도:1971년
  • 선정연도:2015년
상세 내용

1.jpg

He is

정기율 회장(76세)은 23세에 시작한 국수공장을 100여명의 식솔을 거느린 ‘주식회사 미정’으로 키워낸 창업주다. 그는 지금도 새벽 4~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배드민턴을 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물론 회사는 대내외로 능력을 인정받은 대표이사의 관리하에 잘 운영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반세기 동안의 고난과 역경이 가져다 준 삶의 본능인듯하다. 회사에 출근하면 전날 자정 무렵에 꼼꼼히 갈무리해 둔 메모를 펼치는 것으로 업무에 들어간다. 한번 업무가 시작되면 업무상의 식사 약속이 아닌 경우에는 점심과 저녁식사를 제때 맞추는 것이 어렵다.

그렇게 시간이 어찌 가는지조차 모르게 몰두하다 보면 창문 넘어 어둑하게 변해버린 밖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한다. 일을 시작하면 멈추기가 쉽지가 않지만 1년전부터는 퇴근시간을 한시간 정도 당겨보려 노력하고 있다. 건강을 위해서다. 일에 더 몰두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기 위해서다. 늦더라도 일과를 마치고 회사를 벗어나면 오솔길을 따라 경보 형태의 걷기 운동을 한다. 머리속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일과를 정리하기 위해 홀로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사색에 잠기고 만다. 변천된 인생과 변화된 주변 속에서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며 비로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틈이 생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다.

새벽녘 배드민턴과 저녁시간 운동으로 최선을 다한 탓에 나이에 따른 자연스런 지병을 제외하고는 동년배에 비해 참 건강한 편이다. 부모님의 음덕이라고 생각하며 하늘에서 보살펴 주시는 아버님과 어머님께 항상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친다. 아래로는 일편단심 정열을 바쳤던 창업의 터전에 미래를 이끌 훌륭한 인재들이 단단히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그간의 고된 삶에 위로를 느끼며 일말의 미소를 짓는다.


2.jpg

시장을 분석하다

근대 경영학이 19세기말에 성립되었다고는 하나, 한국전쟁으로 국토가 폐허가 된 당시 한국에는 경영의 개념을 가진 일반인들이 있을리 없었다. 경영학은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학문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지만, 경영자에게 필요한 모든 자질을 인위적으로 채워 줄 수는 없다. 타고나거나 삶 속에서 만들어지는 본능에 가까운 자질들이 존재한다. 그런 자질들 없이 정직함과 성실함만으로 기업을 운영해왔기에 너무나 많은 역경을 헤쳐 나와야 했고 좀 더 성장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하지만, 현재 시각으로 본다면 당시 시장조사와 분석, SWOT 분석만큼은 몇 개월에 걸쳐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요즘 세대에게 너무나 이질적일 것이다.
 

한국전쟁 후 곤피밥, 소나무껍질, 송기, 등겨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원조로 배급받은 밀가루는 소중한 음식재료였다. 푸성귀와 호박, 멸치를 재료로 홍두깨밀어 국수를 만들면 땅바닥에 멍석을 깔고 대가족 3대, 4대가 모여 나누어 먹었을 만큼 귀한 음식이었다. 무엇을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던 그때, 고향 산골에서 뛰쳐나와 그대로 경주 시내로 들어가 짐자전거를 사고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장사가 잘 되는 가게, 많은 사람이 줄을 서있는 곳들을 발견한다. 꾸준히 장사가 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달여간 시내를 반복해서 돌아보면서, 이웃 도시들에 가서도 시장과 시내 지역 골목골목을 확인하여 공통되게 성업중인 업종을 확인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의식주가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는 시대 상황속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하면서 장사로 성공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결론은 바로 식업食業이었다.

국내정치가 점차 안정되어가면서 국가에서는 쌀보다는 분식을 장려하게 된다. 빵과 함께 국수공장도 늘어나기 시작해서 점점 서민들도 쉽게 맛 볼 수 있는음식이 되고 있었다. 시장조사를 할 때 가장 길게 줄을 서서 제품을 살려고 기다리던 가게들이 바로 국수房(방)이었다. 이 후 업태조사에 들어갔다. 500원에 쌀은 8Kg 밀가루는 22kg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인근 도시의 가격도 함께 조사한 결과,밀가루의 가격경쟁력은 쌀 대비 평균 3배였다. 국수공장을 만들 경우, 원재료인 밀가루의 배급이 원활할지도 확인을 해야했다. 지금처럼 풍족한 시대가 아니었기에, 밀가루 배급이 원활하지 않아 제분회사(현재의 CJ제일제당)에서 각 국수공장에 배분해주는 밀가루 양이 정해져 있었다. 다시 한번 3개 도시를 다니며, 국수공장만을 찾아다녔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국수를 사가는 현장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밀가루 배급 문제 역시 해결책을 찾아냈다. 국수로 새롭게 인생을 도전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국수 사업을 시작하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지역의 부호였던 어르신을 무작정 찾아가 애걸복걸하며 보리쌀 10가마를 빌렸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전제조건이 있었고 단호하신 어머님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결국 보리쌀 10가마를 대출해 종잣돈을 마련하고 대구에서 국수기계를 구입, 삼고초려 두 달에 걸쳐 공을 들여 국수기술자를 스카우트하였다. 1963년. 시내 변두리에 5평 가게를 임차하여 국수 공장을 시작하였다.

 

3.jpg

넓은 세상을 향해

1971년. 국수공장을 시작한지 10여년이 흘렀다. 터전을 옮겨 간판을 달고 새롭게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일한 종교가 성실이라는 정회장의 말처럼 단언컨대 노력만이 비결이었다. 누구나 유혹당하기 쉬운 지연과 학연, 혈연에 의지하지 않고 사업을 한 것이 철칙이었다. 성공하지 않으면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으나 31살이 되면서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성실한 여인과 가정도 꾸렸다. 책임져야 할 몫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CEO는 서두르지 않는 법이다. 물론 발전이 더딜 수는 있지만 그만큼 실패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한 상품개발의 과정에 투철한 장인정신이 녹아있지 않으면 세상이 냉정하게 등을 돌린다는 것을 알고 있던 까닭에 만드는 제품마다 전력투구했다. 어찌 힘들지 않았으랴만 결국 그의 방식이 통했다.

일을 할 때 마다 즐긴다는 생각을 불어넣는다는 정 회장에게는 자신만의 정신치유법이 있다. 바로 “일을 즐기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는 명제다.일은 자신의 삶을 유지해주는 에너지인 까닭에 즐기게 된다. 행복은 본인의 마음 먹기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정 회장의 건강비결이고 철학이다. 살아오면서 체득한 자신만의 결론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한 달, 일 년이 흘렀다. 예쁜 딸아이가 태어난 데 이어 아들 셋을 연달아 얻음으로써 삶의 의미도 깊어졌다.

1990년. 회사의 규모도 조금씩 커지고, 원대하지는 않더라도 성실한 회사, 탄탄한 나만의 일터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무렵이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라지 않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집에 불상까지 모셔두고 치성드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 정월 대보름이 다가오면 무려 십여 곳의 사찰을 돌며 덕을 쌓던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홀연히 떠나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간곡한 청에 그렇게 좋아하던 담배 도 끊었고, 좋아하던 술 역시도 즐기지 않게 되었을 만큼 못다한 효도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돌아서니 이미 가시고 계시지 않았다.

하늘은 하나를 빼앗으면 하나를 주는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독자브랜드를 개발해 경주는 물론 인근 도시와 전국으로 판로를 개척해 갈 즈음이었다. 1996년 지금의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에 3,500여평의 땅을 마련해 확장이사를 했다. 그러자 국내 굴지의 기업으로부터 OEM방식으로 손을 잡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더욱 좋은 제품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스템 개발과 더불어 직원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면류 뿐 아니라 쌀을 이용한 쌀국수와 떡을 생산하고부터는 입소문이 돌면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통회사뿐 아니라 일등기업을 자처하는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사업의 동반자가 되자며 손을 내밀어왔다.

호황을 거듭했지만 정 회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또한 시장을 넓히는 것과 동시에 연구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경영은 알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의 지론처럼 능력과 조건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운도 따라 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운이란 것도 노력하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이제는 정 회장이 만드는 제품이라면 무조건 판로를 개척하겠다는 국내 굴지의 회사도 생겼다. 더불어 현現 대표이사의 공격적 마케팅은 회사 외연과 내실 강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실리적, 미래지향적 경영이 조화를 이룬 덕분에 여러 대기업에 OEM, PB 방식으로 제품을 납품, 200억 매출을 돌파하였고 이제는 자체 브랜드도 개발해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장의 변화에 눈을 뜨고, 새로운 제품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결과 이상적인 제품 포트폴리오를 완성해 가고 있다.​
이전글 태극당과자점
다음글 천연식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