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우리나라 섬유산업은 성장에 한계가 왔다. 선진국은 자국의 섬유산업을 보호하는 등 국제적 환경도 변했다. 또한, 후발국들은 섬유산업 육성에 열을 올렸다. 국내 사정은 더욱 힘들어졌다. 조금씩 경제가 발전하고, 국가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수많은 제품이 쏟아졌다. 섬유 경기는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지에서 저렴한 인건비를 앞세운 제품이 쏟아지자, 우리나라는 더 이상 섬유 강국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인건비와 원자재, 연료 가격이 상승했고, 섬유산업은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으로부터 밀가루 원조가 이루어지고 전 국민은 수제비, 칼국수 등 분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때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었다.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섬유산업 한길만 고집하며 이어온 회사가 있다. 이곳 경상북도 경산에 있는 ‘(주) 미광’이 바로 그곳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재 섬유로 코오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을 이어가는 회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기계의 자동화의 선두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 기업의 자존심이 강했다.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향상을 위한 노력이 국내 섬유업계를 선도하며 생존해가는 가장 적절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힘겨운 시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특유의 성실과 지혜로 꿋꿋이 이겨냈다.
지금 (주)미광 송인택(75세) 회장이 1965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염색전문 ‘미광다이텍(주)’라는 이름으로 대구시 서구 내당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태평로로 이전 확장하며 원단 제조사 ‘(주)미광’을 설립하고, 꾸준하게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1977년, 새롭게 태어난 ‘(주)미광’은 수출 수주를 받기 시작했다. 당시 경북·대구의 섬유업계는 코오롱과 삼경물산, 그리고 미광이 대표 주자였다. 주 취급품은 나일론이었다. 미광은 사이징, 즉 실이 끊어지지 않도록 실에 풀을 먹이는 작업부터 원단을 제조하고, 염색까지 원스톱으로 처리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아래도급을 주지 않아 빠른 시간에 우수한 품질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장점도 한몫을 했다. 이것이 수출에도 적용되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주)미광의 경쟁 상대는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