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견뎌온
경상북도의 뿌리 깊은 기업들을 소개합니다.

정미소

송천정미소

  • 소재지:김천
  • 대표자명:박두용
  • 설립연도:1962년
  • 선정연도:2013년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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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37년 일제강점기, 다섯 살이던 박두용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 가게 된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알뜰하게 돈을 모아 근처에 땅을 사서 밭도 일구었다.
 

그렇게 8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두용은 일본에서 소학교 6학년이 되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주의의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결국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1945년 조국 대한 은 해방을 맞았고, 두용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
 

해방이 되고 2년 뒤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선생님은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던 치과에 두용을 취직 시켜주었다. 두용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믿었던 치과 의사는 일만 시켰을 뿐 월급은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버텼지만 돌아오는 것은 겨우 용돈 몇 푼 정도였다. 결국 치과를 그만둔 두용은 인근의 인동 양식장에서 일을 했다.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두용은 주인 눈에 들었고, 주위 평판도 좋았다. 그만큼 성실히 일을 했던 덕분이었다. 그러자 인근정미소에서 일손도 야무지고, 기계도 잘 손보는 두용에게 함께 일해보자며 부탁을 해왔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는 것, 휴전이 체결되었고, 두용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여기저기 철공소가 생겨났다. 주용은 철공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두용이 16세가 되던 해에 건강한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아픔은 순간에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을 틈도 없었다. 졸지에 가장이 된 두용은 37세에 청상이 된 홀어머니를 모시고 또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어머니와 함께 두용은 두부와 떡을 만들어 팔거나 소금을 팔아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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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정미소 주인은 6~7년치 월급을 떼어먹고 의성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너무나 억울했던 두용은 의성으로 주인을 찾아갔으나 돈은커녕 도리어 일만 더 해주고 돈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워낙 착했던 터라 달라는 소리 한 번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처음 일했던 정미소에서 또다시 고용살이를 시작했다. 열심히 일을 했던 덕분에 삶은 차츰 정착되어갔다. 성실과 부지런함이 낳은 결과였다. 그러나 옛날 가난했던 시절의 힘겨움을 잊지 않았다. 아끼고 절약하던 정신이 몸에 배어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동생들을 출가시켰다. 생활은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1969년, 서른여덟 살 되던 해에 자신의 피땀이 묻어 있던 송천정미소를 인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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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자식들을 하나둘 출가 시켰다.

박두용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고생했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들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큰아들 범석은 당연한 듯 아버지 대를 이어 정미소에서 일을 했다.
 

열두 살 어린나이였지만 학교를 파하고 오면 아버지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옆에서 가장 오래도록 아버지를 보아왔던 터라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고스란히 익혔다. 40대 중반의 아들은 오래되고 낡은 정미소를 새롭게 준설하고, 시대에 맞게 기계와 시설투자를 하고 싶어했다.
 

그렇게 정미소는 새롭게 태어났다. 아들의 고집대로 시설을 새롭게 하고, 정미소를 넓히자 아버지 걱정과 달리 일감이 늘어났다. 하루 처리량이 늘어나면서 더 먼 곳에서 일거리가 들어오는가 하면 평소 미심쩍어하던 사람까지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힘겨운 시절을 보낸 만큼 이제 이곳 송천정미소 가족들의 꿈은 하나같이 넉넉하다. 이들은 언젠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희망을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희망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하고, 더 먼 것을 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이 집념이 되어 건강한 정신을 만든 것이다. 여전히 순수하고 순박한 모습을 잃지 않은 박두용 옹이다. 그의 아들 박범석(54세) 씨 역시 아버지를 닮았다. 부드럽지만 부러지지 않고, 힘차지만 넘치지 않는 과정을 아버지에게서 보아왔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한 푼의 돈도 그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한 평의 땅도 그저 얻지 않았다. 각고의 노력과 인내와 피와 땀을 흘렸기에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이들은 안다. 그렇게 흐르는 것이 삶이라면 이들에게 그 속은 진정 풍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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